박혜란의 “결혼해도 괜찮아”

01

미혼인 후배들에게 결혼을 권하곤 한다. 서른 일곱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기도 했고, 미혼으로 사느것보다 가정을 꾸려서 살아가는 게 그 나이에 자연스럽다는 논리다.  “결혼말고 할 만한 게 있을까?” 말하기도 한다.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아빠가 되는 일’은 자신에게 전례없는 경험을 선사한다고 말한다. 아내가 들으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겠지만 말이다. 박혜란 교수의 “결혼해도 괜찮아”를 읽게 된 건 결혼해도 괜찮은 이유를 발견하고 싶어서였는데, 내가 얻은 것은 결혼한 아내가 느꼈을 법한 걸 재확인했다는 점.

 

02

“난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무언가 굉장히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아는 걸 과시하지 않는 것 같아 ‘아, 참 겸손한 사람이구나’하고 존경심을 품었고 결국엔 사랑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 남자의 실체를 알고 말았다. 그는 겸손해서 과묵했던 것이 아니라 워낙 아는 것이 별로 없어 과묵했다는 것을. 나는 사기를 당했다고 앙앙댔는데 솔직히 그는 나를 속이지 않았다. 내가 내게 속았을 뿐. 그리 어리서었으니 결혼을 했지. 눈에 꽁깍지가 씌우지 않고 결혼은 불가능하다.” …

“타고난 결혼주의자였던 나는 결혼의 쓴맛 단맛을 이미 맛본 결혼경략자였음에도 그때만 해도 결혼을 자기 인생 계획서에 끼워 넣지 않은 그 후배들에게 ‘그래도 결혼은 한 번쯤 해 볼만한 거’라느리 ‘안 하고 후회하느니 하고 후회하라’는 말을 조언이랍시고 하면서 은근히 우월감을 과시하곤 했다. 지금은 얼굴이 화끈거린다. 결혼했다는 게 무슨 훈장이라고. 그들은 뭘 몰라서 결혼을 하지 않은게 아니다. 그들은 너무 잘 알아서 결혼을 안 하는 거다. 경험해 보지도 않고 결혼의 속성을 꿰뚫은 그들이 나보다 인생을 아는 사람들이다. 결혼에 목매달은 내가 뭘 몰랐던 거다.” …

“하루아침에 남자가 변한 걸까? 차라리 그랬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그가 원래 처음부터 나한테 사기를 친 걸까? 그랬다면 사기꾼인 게 드러난 순간 그를 원망하고 떠나 버리면 그만이다. 문제는 하루아침에 변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거다. 연애할 때의 나와 결혼했을 때의 내가 딴판이었다는 거다. 내 속에서도 가장 먼저 내 눈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콩까지 때문에 흐릿했던 시력이 갑자기 좋아졌다는 거다. 그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성격들이 하루아침에 단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다. 심지어 처음부터 유일한 결혼 상대로 못 박았던 그가 실제로는 전혀 결혼에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라는 엄청난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한번은 시내 한목판 다방에서 꼬박 두 시간을 기다린 적도 있었다. 아무리 무던한 성격이지만 처음부터 두 시간을 기다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삼십 분은 ‘오늘도 또 늦는군’ 혀를 차며 가볍게 기다린다. 다음 삼십 분은 분노가 서서히 쌓여 간다. 드디어 에이 가 버려야 다음번에 정신 차리고 시간 맞춰 나오겠지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런 심정을 면전에서 표시행지 하는 마음으로 삼십 분을 또 보낸다. 그러다가 갑자기 엄습하는 불안감! ‘나오다가 무슨 사고가 난 건 아닐까’라는 걱정에 자리를 못 뜬다. 다방 마담의 눈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저 ‘제발, 제발’ 하고 기도할 뿐이었다. 그때 봉두난발을 한 남자가 다방 문을 들어선다. 아이쿠 다행이다 싶은 마음에 자존심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으로 그를 맞는다. 남자는 해맑은 표정으로 변명이랍시고 던진다. ”미안해, 늦잠을 잤잖아.“ 아 나는 오늘도 헤어지기는커녕 남자에게 연애의 기본 에티겟을 가르칠 찬스조차 놓치고 말았다. “…

“어느 여름인가, 당시 인기 약속장소였던 덕수궁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뜨거운 한낮, 무려 두 시간이 지나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걱정은 점점 커져 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대문 밖에서 우체부 아저씨가 외치는 소리 “전보요” 내용은 어이없음 그 자체!, ‘친구들과 부산 왔음, 미안.’ 그때 헤어졌어야 했는데. “…

“잘 아는 선배 한 분은 남편이 평생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해 불만이었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이혼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겨룩은 남편과 사별할 때까지 이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좀 못된구석이 있어야 그 핑계로 갈라서지. 사람 자체는 너무 착해서 탈일 정도인데 단지 돈 때문에 이혼핶ㅆ다면 자기가 너무 나쁜 여자인 것 같아서 할 수가 없었어. 차라리 외도를 하거나 한 대 때리기라도 했으면 옳다구나 하고 이혼을 했을 거야라고 털어놓았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비슷하네, 속을 썩이기는 했지만 근본은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제였다. 남편감으로는 결점투성이지만 한 인간으로 놓고 보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객관적 시각이이혼을 방해했다는 말이다. 궁색한 핑계라 해도 할 수 없다.”

“결혼 해서 좋은 점이 고작 아이 낳은 거예요?” 결혼 전 내가 품었음직한 비웃음이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나올 수 있는 이 비웃음에 대해선 ‘아이 낳는 게 고작이 아니라는 걸 결혼해 보면 이해할 거다’라는 꼴통 같은 응수로 마무리하겠다. 그 밖에 결혼해서 좋은 점을 꼽으라면 매우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성숙’이 아닐까 싶다. 주위를 둘러보면 결혼을 하지 않아도 성숙한 인간들이 널려 있고 결혼한 여자들 가운데 성숙하지 못한 인간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니 결혼이 인간을 성숙시킨다는 일반론은 지극히 위험하다. 다만 내 경우를 말하자면, 만약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정말 봐줄 수 없는 인간이었을게 분명하는는 이야기다. 지금도 나이만 엄청 먹었지 나이에 걸맞은 혜안은커녕 치졸한 짓을 저지를 때가 너무 많지만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온 건 순전히 결혼을 통해 갈고 닦여진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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